위상공간

©2022 topological space

함성주 찢어진그림 포스터

녹아드는 프레임

함성주 작가는 우리가 주변에서 접하는 디지털 형상-게임의 스틸컷 이미지, 우리를 훑고 지나가는 짧은 동영상 등 실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성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거쳐, 그것에 번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두 번의 개인전 <have we met before>, <우리는 사랑할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를 지나오면서 디지털 세계에서 다시 우리가 사는 현실로 개입되는 과정 속에 녹아드는 이질감과 동일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번역은 작가가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일관적으로 유지해 온 개념이다. 번역된 결과물을 모르는 언어로 상정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미지의 세계로 볼 수 있고, 만약 이미 알고 있는 언어라면 파편적으로 뜻을 함축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원래의 언어가 변형 혹은 탈각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그에게 번역이란 원본이라고 불렸던 형태는 스크린을 통한 보여짐이나 2차 가공으로 재조합되어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우선 원형의 인터넷 이미지를 가져오려면 움직이거나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기 위해 캡처나 저장, 일시 정지와 같은 과정이 수반되는데 디지털 세계의 편집은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나 각도로 돌려볼 수 있으며, 현실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오브젝트나 디지털 이펙트의 개입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실재하는 세계를 보는 것보다 번역되지 않은 날것의 이미지, 가령 게임의 이벤트 씬이나 밈, 과거 VHS 규격의 저장매체 속에 들어 있던 이미지들은 생생하지만 동시에 현실에 개입될 수 없는 여러 오브제나 상황이 겹치는데 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법칙이면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자크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질서와 논리의 상징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법칙들을 눈에 담거나 카메라 렌즈로 다시 찍으면서 그 안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나 꿈, 기억이 합성되어 재조립된다. 작가는 게임이 띄워진 화면에서 방출하는, 모니터 가 나열하는 빛의 법칙으로 재현된 가상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어두워야 하는 본인의 방 풍경을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 두면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발견하려는 탐험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작가의 번역은 최근의 작품에서 데이터모싱(Datamoshing)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 차례 더 확장되는데, 화면이 고장난 것처럼 넘어가는 이 기법이 사용된 영상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한다. 데이터모싱 기법은 영상이 전환될 때, 마치 손상된 것과 같은 형상이 나타나고, 한편 영상을 멈췄을 때 정확한 이미지가 나오지 않고 앞과 뒤의 두 프레임이 섞이면서 구분이 희미해지게 만드는 것이기에 이 편집법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데이터의 삭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기법은 온전한 상이 담기는 I-프레임과 오로지 화면 전환을 위한 다른 프레임들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P-프레임들의 움직임이 연결된 영상에서 정보를 가지고 있는 I-프레임을 손상시키고 P-프레임으로 대체 및 복제하는 것이다. 작가는 열화와 노이즈뿐인 영상이미지를 두고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용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영상을 본 시간만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관람자는 내러티브가 삭제된 상태, 오로지 회화로 남겨진 시간의 흔적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데이터모싱으로 녹아버린 프레임들이 현실에 스며드는 광경, 출처가 불분명한 회화의 표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프레임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과연 이 프레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하였을까? 함성주는 미지에서 온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방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환대한다.